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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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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11, 2024 2월 12일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 배반자를 향한 긍휼
    본문 : 막 14: 12-21 유대인들은 그들의 정월인 니산월 14일을 유월절 예비일이라 하여 양을 잡고 음식을 준비하며 보내는데 보통 이날까지를 포함하여 무교절이라 통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전날 일몰 직후부터 다음날 일몰 직전까지를 하루로 여기는 그들의 풍습에 따라 14일 저녁, 즉 그들로서는 15일이 시작될 때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는 것으로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유월절을 예비하심(12-16) 본문의 시간적 배경에는 알아 두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처형되신 날이 유월절 예비일 즉 니산월 14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있었으므로(요18:28;19:14,31) 오늘 본문의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예비는 정규 예비일보다 정확히 하루 앞선 13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 복음서가 유대인들의 관습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 되었음을 볼 때, 아마도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소개하면서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는 설명을 첨가함으로써 예수님과 구약의 유월절과의 상관관계를 이해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고난 주간 중 넷째 날(목요일)에 있었던 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유월절 식사는 관례적으로 예루살렘 성내에서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심한 준비로 성내에 장소를 마련해 놓으시고 두 제자를 보내 유월절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배반을 예언하심(17-21)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며,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셨다고 해서 그를 팔아넘긴 자의 행위까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듭 배신자의 신원이 추측될 만한 실마리들을 제시하시며 자신을 배반하려는 제자에게 끝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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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5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10, 2024 2월 11일 헌신하는 여인 , 배반하는 제자
    본문 : 막 14:1-11고난 주간 중 넷째 날(수요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과 무교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때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첫 소생을 멸할 때 이스라엘의 집은 온전히 보전해 주신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이며 무교절은 이 유월절 날부터 7일 동안 계속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1-2) 유대의 지도자들은 함께 모여 예수님을 모해할 방책을 찾고 있으나 백성들이 두려웠습니다.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모여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자극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명절이 끝난 뒤에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한 여자(3-9) 제자들과 함께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붓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3에 의하면 이 여인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합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될 만큼 비싼 것으로 여인들이 매우 귀중하게 여기는 혼수품이었습니다. 여인은 이 귀한 것을 예수님께 사용하는 것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태 복음과 요한복음의 병행 귀절에서 각각 ‘제자들’과 ‘가룟 유다’로 기록되어 있는 ‘어떤 사람들’은 여인의 이러한 행동에 분을 내며 비난하였습니다. 여인이 쓸데없는 낭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이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절대적인 사랑을 품고 있던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께 임박한 죽음을 예비하는 특별한 섬김이 되었으며, 이일에 대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성도의 사랑과 섬김은 복음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10-11) 이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와 대조를 이루는 유다의 배반이 기록 되고 있습니다. 명절을 피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적대자들의 계획이 뜻하지 않은 유다의 도움으로 수정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교묘한 계획도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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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4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9, 2024 2월 10일 때를 분별하는 지혜로 깨어 있는 충성된 삶
    본문 : 마 13: 28-37우리들은 종말의 때와 징조에 대한 지식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거짓 영들의 미혹에서 자신을 지키며 시대를 분별하는 가운데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이 땅에 임하실 그리스도는 우주의 대변혁을 동반하며 심판주로 오실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인류의 대심판과 함께 택함받은 성도들을 구별하시는 일이 동시에 일어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교훈(28-29) 제자들의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그들에게 충고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물이 오르고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여름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듯이, 무수한 재난과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보거든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만약 이런 사건들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한다면 제자들은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영원성(30-31) 엄숙한 서론적 표현과 같은 말로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이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그의 예언(30절)의 성취를 보증합니다. 현재의 우주는 대변동으로 종말이 올 것이나 이 예언들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말씀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연연하여 사는 인생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원하신 말씀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도 그의 영원하심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재림 시기에 대한 침묵(32) 다가오는 그 날과 그 시의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천사들이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지식의 한계는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육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예수는 자발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였습니다. 비유를 통한 경고(33-35) 예수님께서는 ‘그 때’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정한 때가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고 거듭 훈계하셨습니다.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깨어 있으라(36-37) 예수님의 재림이 도적과 같이 알 수 없는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재림 시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입니다(계16:15).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영적인 경각심을 가진 성도의 신앙 자세를 말합니다. 이때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를 위한 중보 기도 또한 포함되어야 합니다(엡6:18). 이는 말세의 사단의 미혹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택함받은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딤후 2:26). 말세에 상황이 매우 어려울 것임을 말씀하셨지만 깨어 기도하므로 담대해지고 강건해져서(고전16:13)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으므로,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고전15:34).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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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3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8, 2024 2월 9일 대환난 후에 있을 인자의 영광스로운 재림
    본문 : 막 13: 14-27주의 재림이 있기 전에 있을 큰 환난에 대한 내용인 본문은, 가깝게는 예루살렘 성이 훼파될 때 있을 환난을 말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종말, 즉 계시록에 예언된 종말론적 대환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신하라(14-17) 예수님은 대환난이 멸망의 가증한 우상과 같은 혐오의 대상이 ‘서지 못할 곳’ 즉 성전에 세워지는 것을 징표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이 징표를 보거든 즉시 예루살렘 성을 떠나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이 환난이 얼마나 급박한지 소유물은 물론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기 위해 집 안에 들어갈 여유도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임신이나 어린 아이로 인해 신속히 피하지 못해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동정하실 정도입니다. 실제로 유대전쟁이 일어나 로마군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왔을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성의 견고함과 성전이 있음을 믿고 예루살렘 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성과 함께 멸망당한 반면에, 이 말씀을 기억한 그리스도인들은 요단 산지로 피신하여 참변을 면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고난을 피하게 되며 주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에는 순종하는 자를 구별하셔서 종말과 영원한 형벌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기도하라(18-20) 환난의 날 자체를 생략할 수는 없지만 곤경의 정도를 감해 주시도록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조부터 지금까지 전무후무할 정도로 극심한 환난이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생각하셔서 그 기간을 줄여 주시는 자비를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말의 전형적인 예표이기도 한 예루살렘 멸망 당시의 환난의 극심함을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이 전쟁에서 유대인 110만명이 죽었고 9만 7천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로마인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동안 성내에는 식량난이 극심하여 굶어 죽거나 자기 자식을 잡아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미혹 당하지 말라(21-23) 환난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나머지 거짓 그리스도에게 현혹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마저도 무너뜨리고자 하는 미혹의 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거듭 경계하시면서 이렇게 종말의 비밀을 미리 알려 주시는 이유가 제자들이 종말의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가 미혹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표적에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와 부활의 소망 안에 거해야 합니다.그리스도의 재림(24-26) 먼저 해와 달과 별 등 천체의 질서가 와해되는 이변이 있은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처음 이세상에 오셨을 때와 같은 연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이 아닙니다. 질서가 깨져 암흑으로 뒤덮인 천체를 배경삼아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오시는 신의 모습입니다. 또 초림 때와 같이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온 지구 위의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함께 바라보는 가운데 임하실 것입니다.택하신 자들의 구원(27) 그때에 인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방에서 그의 택한 자들을 모을 것입니다. 사방이란 세계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방향으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버림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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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2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7, 2024 2월 7일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
    본문 : 막 13:1-13고난 주간 중 셋째 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종교 지도자들과 변론하고, 제자들과 백성들을 가르치며 하루를 보내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성전을 떠나 나가십니다. 위선과 탐욕으로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성전과 결별하시는 것입니다.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1-2)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 80여년 이상 걸려 스룹바벨의 성전을 확장 재건한 것으로 이 성전의 규모가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한지 보는 이들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아름다운 외관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건물 내부에 가득찬 가증함과 패역, 그리고 이 죄악으로 인해 닥쳐 올 처절한 파괴까지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A.D.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은 이 헤롯 성전의 서쪽 벽의 잔해입니다.     재난의 시작(3-8)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 동편에 있는 산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성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성전을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께 네 명의 제자들이 나아와 성전 파멸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은밀히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종말의 첫째 징조는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입니다. 예수님은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종말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십니다. 두 번째 징조는 범 세계적인 전쟁과 천재지변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이 주장해 가시는 인류 역사의 과정상 필연적이며 단지 새 시대를 열기 위한 해산의 고통이 시작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받을 위험(9-13)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재난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심으로 제자들이 고난 가운데 처했을 때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의 권력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며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혹독한 곤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상황 가운데 스스로 빈틈없이 경계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촉구하셨습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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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1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6, 2024 2월 7일 다윗이 고백한 주님 주님이 찾으시는 헌신
    본문 :  막 12:35-44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난해한 질문으로 변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은 모든 적대자들을 침묵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주도적인 입장에서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외식과 형식에 빠진 타락한 신앙을 질타하셨습니다.   다윗과 그리스도(35-37)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하여 왔던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인들을 위하여 옛날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바램과는 다른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밝히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할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가 혈통으로는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났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윗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윗의 주가 되시는 것을 지적하시며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관이 얼마나 그릇되어 있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38-40)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맡아 가르치는 자들로 유대사회에서 선생으로서 존경받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인들과 다른 옷을 입음으로 자신들을 거룩히 구별하며 성스러운 직무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대중들의 지극한 존경과 대접에 젖다보니 차츰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차츰 자신들의 명예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구별된 옷을 입었으며, 높은 자리를 탐하는 명예욕에 빠진 것입니다. 또한 물욕에 빠져 반율법적인 행위도 서슴치 않았으면서 오히려 경건한 모습으로 자신을 가장하려는 가증스러움을 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서기관들의 죄악을 지적하시며 그들이 받을 심판이 더욱 중함을 경고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41-4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헌금의 진정한 의미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타락한 지도자들은 헌금의 양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정도를 평가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동전 두 렙돈이지만 자신의 소유 전부를 드린 과부의 헌금이, 액수는 많지만 자신의 소유 일부분을 드린데 불과한 부자의 헌금보다 많다고 하셨습니다. 헌금 정신의 본질은 금액의 다소에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느냐에 있는 것입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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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0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5, 2024 2월 6일 모든 것보다 우선시할 계명,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
    본문 :  마가복음 12:28-34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난해한 질문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리석고 난해한 질문을 지혜롭게 대답하시므로 당시의 위선된 종교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서기관이 율법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은 총 613개 조항으로 248개의 규정령과 365개의 금지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 간에는 이 조항들 중 어느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법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 의미로 서기관은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28-31) 율법에 관한한 전문가인 서기관들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과 사두개인들 간에 벌어진 논쟁을 곁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의 입을 봉쇄해 버린 예수님의 교훈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또다른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 첫째’란 그 가치와 중요성에 있어서 최고의 계명을 말하는 것으로 즉 율법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서기관의 답변(32-33) 서기관은 예수님의 답변에 감탄하며 동의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답변이 자신의 생각과 같음을 확인한 듯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는 예언자들의 교훈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많은 조항의 계명을 놓고 어느 것이 크고 적으냐를 변론하기 보다는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유일한 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서 계명에 따라 순종하는 삶이 요구됩니다. 이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15:22)”라는 말씀에 잘 표현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사실이 너무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각종 의식과 제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주의가 만연하고 있었음을 볼 때 이 서기관의 깨달음은 상당히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34) 예수님은 서기관의 대답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이끌림 받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지혜가 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에 도전해 왔던 모든 도전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어떠한 흠도 발견하지 못한 채 오히려 자기들의 자격 없음만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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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4, 2024 2월 5일 세금과 부활에 대한 천국 시민의 이해
    본문 : 막 12: 13-27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악한 농부가 누구를 뜻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예수님을 잡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앞두고 원근각지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공연한 소란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함정이 있는 질문들을 준비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야합(13)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또다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담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반로마적인 민족주의에 편승해 종교적 위선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있는 바리새파는 물론 로마 권력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이익만을 탐하는 헤롯당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본래 대립적 관계로 공존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서로 야합하고 있습니다. 이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예수님을 심문하는 날 친구가 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눅23:12).납세에 대한 질문(14-15상)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예수님께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찬사를 늘어놓은 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납세를 긍정하면 매국노로 몰아 여론 재판을 시도할 것이고, 부정하면 로마 권력에 대한 반역자로 고소할 참인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은 마치 뱀의 두 혀처럼 독을 품고 있는 모습이며,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마귀의 모습(마4:1-11)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살기를 품은 이들은 이미 마귀에 의해 조종되는 불의의 병기로 전락한 것입니다.예수님의 답변(15하-17) 예수님은 현명한 대답으로 가이사의 요구도 합법적이고 하나님의 요구도 합당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국가 권력과 하나님이 서로 반목 관계가 아님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완전히 능가하는 예수님의 지혜에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면서 사회의 법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에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18) 사두개인은 귀족에 해당되는 신분의 사람들로 특별히 제사장의 가족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도 지도층에 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었지만 부활, 천사, 영생, 영혼 등에 대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도리어 불신앙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신앙이 사회적, 종교적 신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보여줍니다.모세의 계대 결혼제도를 빙자한 질문(19-23) 사두개인들은 신25:5-6에서 모세의 계대결혼(levirate marrige)에 대한 규례를 따라 한 여인을 칠 형제가 다 아내로 취하였는데, 부활할 때에는 뉘 아내가 되겠느냐는 매우 난처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계대결혼의 목적은 자식없이 죽은 형제의 가문을 이어주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과 재산을 보존해주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례와 규례에 대한 목적을 올바르게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예수님의 답변(24-27) 예수님의 답변은 부활과 천사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으며 부활 후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그 질서부터가 다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한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이 모세오경에는 부활을 인정하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여 왔는데, 예수님은 바로 이 모세오경 중에 한 부분을 예로 드셔서 저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자신의 선입견과 고정관념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불신하고 부정하는 어리석은 사두개인처럼 되지 말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진리 안에 거하는 신앙자세가 필요합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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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3, 2024 2월 4일 탐심으로 저버린 은혜, 주인을 대적하는 악행
    본문 : 막 12:1-12 당시 팔레스틴에는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타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나 로마인들이 많아서 부재 지주와 소작인 간에 문제들이 빈발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음흉한 저의가 시시각각으로 표출되어가자 예수님은 악한 농부를 비유로 들어 그들을 정면으로 책망하시며 경고하십니다. 포도원과 주인(1) 참으로 주인은 세심하고 사려깊은 노력을 기울여 포도원을 꾸몄습니다. 야생 동물이나 침입자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포도원을 지키고 관리할 수 있도록 울타리를 두르고 망대까지 세웠습니다. 수확한 포도를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도록 구유 자리도 팠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권한을 모두 소작을 준 농부들에게 위임했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연약한 포도나무 같은 민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가나안 땅으로 이끄신 후 그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이들을 돌볼 자로 선지자와 지도자들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농부와 종(2-5) 수확의 때가 되자 주인은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계약을 이행하기는 커녕 도리어 주인의 권위에 도전하여 주인의 종을 때린 후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놀라운 인내로 다른 종들을 계속 보냈으나 농부들의 패역함은 더 심해져 상처를 입히고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회개의 열매, 믿음의 열매, 순종의 열매 등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유대 백성들이 행한 핍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해 살기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의 흑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농부와 아들(6-8) 주인은 최후의 방법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공경하리라’ 기대했던 주인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자기들의 이권을 확보하려는 욕심에 농부들은 아들마저도 죽이고 그 시체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버리는 포악함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심판(9-12) 이제까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내와 관용을 보여주었던 주인이지만 마지막 기회마저 거부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는 말씀대로 행한대로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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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1, 2024 2월 2일 주님이 기대하시는 열매, 정결한 교회와 순전한 신앙
    본문 : 막 11: 11-19고난 주간 중 둘째 날(월요일)에 예수님은 메시야의 권위가 드러나는 일련의 교훈들을 주셨습니다. 전통적인 종교관습에 젖어 있던 백성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기이히 여겼으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구체화 할 만큼 자기들의 권위에 심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12-14) 언뜻 생각하면 열매 맺을 때도 아닌데 열매를 구하시고는 잎 밖에 없다고 서슴없이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당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의 배고픔과 이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한 무화과나무, 그리고 그 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가 핵심이 아닙니다. 포도나무와 마찬가지로 무화과나무도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외적인 형식만 화려할 뿐 그 내용은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으며 하나님의 때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전 정화(15-17) 성전내 이방인의 뜰에는 대제사장의 승인을 받은 상인들이 제사에 필요한 짐승들과 물건을 팔아 먼 곳으로부터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이미 제사장에게 제물로 합당하다고 확인받은 짐승을 상인들을 통해 구입하였으며 성전세를 물기위해 이방 화폐를 성소의 세겔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본래의 선한 목적은 상실되고 상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서로 결탁하여 자신들의 이윤을 보다 많이 남기기 위해 순례자들을 착취하는 갖가지 부정과 부패를 자행하였습니다. 성전이 세상보다도 더 타락해 강도의 굴혈로 변한 현실에 직면하신 예수님은 완력도 불사하시며 성전 정화작업을 수행하셨습니다. 성전을 빌미로 이익 추구에 눈이 멀었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부패한 성전으로 대변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종교상을 통렬히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전 경내를 감람산으로 가는 지름길로 사용하는 것도 막으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만나주시는, 그리고 당신의 백성이 모든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처소로서 거룩히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두려움(18-19) 성전 정화 작업에 이어 성전의 존재 목적에 대해 선포하므로 무리가 예수님의 교훈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종교 지도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빛이 비취므로 어둠이 두려워 떨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면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므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히11:38).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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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31, 2024 2월 1일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
    본문 : 막 11:1-10오늘부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마지막 일주일인 고난 주간의 일들이 기록됩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 첫날(일요일)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입성(1-7)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곧 당신이 평화의 왕 메시야이심을 알리는 일종의 무언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정복자들처럼 거창하게 군마를 앞세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더구나 그 나귀마저 빌린 것이었고 안장도 없어서 제자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이는 스가랴 9:9의 성취로서 그리스도의 겸손함과 평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몇 조각의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주께서 스스로는 배고픔을 감수하신 일이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셨던 권능의 주께서 스스로는 죽음의 쓴 잔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처럼 만왕의 왕이며 만유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무리들의 반응(8-10) 비록 예수님을 통해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 정도만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많은 무리들이 분명 왕으로서의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으며 밭에서 벤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고 예수님을 앞뒤에서 따르며 ‘호산나’로 환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많은 시간을 갈릴리라는 외딴 지역에서 보내셨고 이적을 베푸실 때에도 그 일을 비밀로 해두도록 당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개선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서 입성하듯이 의도적으로 무리들의 환호를 받아가며 당당하게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날은 유월절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이라는 마지막 사단과의 일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에 당도하셨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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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30, 2024 1월 31일 간절한 기다림과 외침, 소원을 이루시는 주님
    본문 : 마가복음 10: 46-52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여리고에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공생애 기간을 마무리 하시게 됩니다.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46-47)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가시는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고 계신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소경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은 ‘다윗의 자손 예수’였습니다. 이 호칭은 유대교적 전통에서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당시 바디매오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고 있었음을 볼 때 소경인 바디매오의 영적 안목이 두 눈이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심히 소리 질러(48-50) 소경인지라 예수님이 어디쯤 지나고 계신지 알 수 없는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의 몰이해와 매정함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 높여 예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결연히 나아가시던 엄숙한 발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의 간구를 듣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디매오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께 대한 그의 갈망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벅찬 감격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기뻐하고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줍니다.보기를 원하나이다(51-52)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단순히 보기를 원하는 희망사항이 아닌 메시야가 오셔서 행하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사35:4-6). 자신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다윗의 자손 예수이신 메시야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소원대로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시게 됩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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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9, 2024 1월 30일 생명 다해 섬기는 종 예수 그리스도
    본문 : 막 10: 32-45문제의 발단을 일으킨 두 인물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시는 현장이나 변화 산상의 현장에 동행했을 만큼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배려를 자신들을 다른 제자들보다 우위에 두셔서 예수님에 버금가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32-34) 십자가를 향하여 결연한 모습으로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두 번째 예고 때보다 더욱 상세하고 정확하게 앞으로 있을 고난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십니다.으뜸되길 원하는 두 제자(35-4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하게 될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세 차례의 예고를 들었으면서도 두 제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의 관심은 메시야 왕권의 영광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위기를 보니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뭔가 일을 벌이실 것 같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그 전에 베드로를 제치고 제 2인자로서의 자신들의 위상을 견고히 해 놓고자 예수님의 확답을 들으려 한 듯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친이모이기도 한 자신들의 어머니까지 등장시켜 청탁을 넣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 좌, 우편이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면서 그 자리를 탐하는 두 제자의 영적 어리석음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메시야 왕국에서의 영화를 얻는 방법은 권좌에 앉는 것에 있지 않고 도리어 고난과 죽음을 통해 권력을 포기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잔’과 ‘세례’라는 말로 설명하시고 그 영광을 부여하는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두 제자 뿐만 아니라 나머지 열 제자 모두 고난은 간과하고 영광만을 차지하려는 야심에 서로 갈등하고 있습니다.섬기러 오신 예수(42-45)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예루살렘에서의 왕권적 통치, 즉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정치적 집권 쯤으로 생각하고 저마다 큰 권력을 탐하고 있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 세상과 현실에 철저히 역행하는 행동 윤리를 제시하십니다. 복종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그 분이 친히 보여주신 섬김과 낮아짐, 타인을 위해 대신 죄의 대가를 치른 사랑과 헌신의 모범을 따라 행해야 하며 이것이 곧 메시야 왕국에서의 통치 질서라는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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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9, 2024 1월 29일 영생을 얻기 위한 선택, 제자가 되기 위한 포기
    본문 : 막 10: 17-31 어린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를 교훈한데 이어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의 모습을 한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재물(17-27) 청년은 예수님께서 열거하는 여러 계명들을 다 지켰노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고 자기 자신도 포기하는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 달려나와 무릎을 꿇으며 영생을 구하는 간절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 가운데 돌아섰습니다. 그 만큼 물욕은 하나님 나라의 길을 막고 있는 뿌리 깊고 커다란 장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 물질을 더 신뢰하기 쉬운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역설적으로, 설령 부자라 하더라도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면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극빈자라 할지라도 물질에 연연하여 세속적 욕망으로만 가득하다면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먼 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예수님의 비유에 놀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탄식하였듯이 인간의 노력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분을 의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포기할 때의 보상(28-30) 예수님을 위해 혈연관계나 재물을 포기하면, 십자가를 져야하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내세에서의 영생뿐만 아니라 금세에서도 포기한 그것들을 더 풍족하게 보상받게 된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31) 앞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기득권과 우선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훌륭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기득권과 우선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헌신과 순교정신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나중된 자로 먼저 된 자인 바울이 좋은 모본일 것입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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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7, 2024 1월 28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가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
    본문 : 마가복음 10:1-16절 가버나움을 떠나 예수님 일행이 당도한 곳은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이라고 하는 베레아 지방입니다. 베레아는 세례 요한을 처형한 장본인인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 지역으로 그는 불의한 이혼과 결혼으로 인해 세례 요한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 결혼과 이혼문제는 첨예한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민한 부분을 질문하여 예수님의 답변에서 율법과 배치되는 점을 책잡아 공격하기 위한 증거를 삼고자 합니다.  결혼과 이혼(1-12) 신명기 24:1-2에서 모세는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될 때에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이혼시키고 재혼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남자들이 이 구절을 합법적인 구실로 삼아 여자의 작은 실수에도 거리낌 없이 이혼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입니다. 본래 모세가 이 법을 제정한 것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의 인권이 유린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마치 적극적으로 이혼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혼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라고 논박하십니다.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제도이며 그 결합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므로 이혼은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곧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비록 합법적 절차를 거쳐 이혼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 아이(13-16)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막으려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조치에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에 반대되는 심각한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오는 것을 막지 말고 용납하여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전적인 신뢰심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장년위주의 교회에서, 가정에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촉구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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