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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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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6, 2024 1월 27일 타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죄에 대해서는 단호합시다.
    본문 : 막 9:38-50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요한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자신들처럼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있는 자를 보고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과연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를 위하는 자(38-42)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를 드시며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능력을 행한 사람이 금방 예수님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범한 믿음 때문이며, 둘째는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편협하고 인색한 배타주의적 태도는 교회가 지양하여야 함을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물 한 그릇을 주는 작은 봉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행해질 때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자에게 있을 복을 강조하십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 아무리 연약하고 미미한 자일지라도 그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훼방꾼이 있다면 그 훼방꾼에게 미칠 형벌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 이상의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범죄에 대한 경고(43-48)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를 방해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철두철미한 수단을 강구하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신체기관 중 가장 민감한 감각기관인 손과 발, 눈을 예로 드셔서 범죄의 원인이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만약 범죄의 원인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 지옥에 던져지고 만다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죄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빼어버리는 철저한 회개와 현재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소금의 사명(49-50) 소금은 맛을 내고 음식을 보존시키며 부패를 막는데 효과가 있습니다. 섬김을 위한 자기 희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 등의 행위는 이 세상의 삶에서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세상에 대하여 소금의 사명이 있으며 소금의 역할을 통해 ‘서로 화목하게 하는 생활’이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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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0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5, 2024 1월 26일 양적 무지를 깨우치고겸손과 섬김의 자리로
    본문 : 막 9:30-37 고난의 때가 가까워 오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의 행보에 오르시기 전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가르치는데 주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아직도 이 세상의 일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30-32) 예수님은 복음 전도사역을 잠시 멈추시고 열 두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집중하기 원하셨습니다. 가르침의 주제는 바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8장 31절의 첫 번째 예고 때보다 더 구체적으로 인자의 고난과 죽음, 부활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조차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이 심히 근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8:23).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에 대해 올바로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을 지상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왕이 되어 백성을 구원하실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이 고난받고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첫째가 되는 길(33-37)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정권을 잡으시고 왕위에 오르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그때가 되면 서열 순서대로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의 서열에 관심을 갖고 논란을 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뭇 사람들의 ‘끝’에 서서 ‘섬기는 자’가 뭇 사람들의 ‘첫째’가 된다는 역설적인 진리로 천국의 질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이 말은 첫째가 될 목적으로 끝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인간 관계의 표준으로써 ‘섬김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셨습니다. 당시의 문화는 아이들을 미숙하고 유치하여 별 가치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자신을 영접하는 것을 동일시 하시며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 자들이 바로 교회 공동체에서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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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4, 2024 1월 25일 믿음과 기도로 능력을 갖추는 제자
    본문 : 막 9:14-29 변화산 사건이 있었던 이튿날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큰 무리와 아홉 제자들이 둘러서서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하자 서기관들이 저희들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오심(14-16)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제자들을 놓고 서기관들이 비난하며 변론할 때에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였습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변화에서 나오는 후광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기치 못하게, 그러나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궁지에 몰려 있음을 아시고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는 질문으로 서기관들과의 쟁론에 관여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대적하는 무리들 앞에서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위로하시며 격려해 주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심(17-27) 아이의 아버지는 먼저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데려와 고쳐주기를 청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를 비롯한 서기관들, 군중들, 그리고 아홉 제자까지 믿음이 부족함을 통분히 여기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십니다.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는 아이의 아버지의 간구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하고 절망적인가를 진단하기 보다는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의 결핍이 전정한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28-29)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의인의 간구만이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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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3, 2024 1월 24일 예수님의 권위를 확증한 변화산 영광
    본문 : 막 9징 1-13절 이사건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확증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고를 완료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급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영광 중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며 미래의 영광은 그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통에 뒤이어 나타날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제자들의 반응(1-8) 주님은 세 제자를 뽑아 변화산에 올라가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외모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신비로운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초자연적이고 눈부신 출현에 제자들은 심히 놀라면서 영광스러운 경험을 오래 끌고자 그 곳에 초막 세 개를 짓는 것이 좋겠다고 베드로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 사건의 참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그에게 순종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예수님의 경계하심(9-10)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부활할 때까지는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세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그들은 예수님의 변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그 의미를 바르게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당황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희들끼리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부활은 믿었으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기치 못한 선포에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11-13)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서기관들의 주장과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즉, 그들이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는 서기관들의 주장이 옳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왔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바로 세례 요한인 것입니다. 또 제기된 문제는 왜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이미 예고된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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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2, 2024 1월 23일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삶
    본문 : 막 8:27-9:1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 40km 북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근방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 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 자기 이름을 따서 지역 이름을 붙인 헤롯 빌립의 영토였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7-30)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열 두 제자의 대변인으로 행동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보다 완벽한 형태로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마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침묵하라고 명하십니다.예수님의 수난의 예언(31-32)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던 정치적 의미의 메시야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는 종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간곡히 만류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심(33-38) 예수님은 베드로의 만류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몸서리 쳐지는 일이지만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고 대속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참된 제자의 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중심적 삶을 유지하려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며, 예수님과 복음에 충성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영원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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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1, 2024 1월 22일 마음이 둔한 제자들, 두번 안수를 통한 교훈
    본문 : 막 8:14-26당시 사람들은 정상적이 아닌 데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행하신 표적을 무수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것과 그들의 마음이 맹목과 위선과 완악함으로 예수를 책잡고자 하는데 있음을 보시고 깊은 탄식을 하셨습니다.누룩에 대한 경고(14) 바리새인들의 요구는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 줍니다. 그들은 형식만을 중시하고 사물의 근본을 잊어버렸고 육체적인 것에 마음이 끌려 정신적인 것을 등한히 하는 습관에 젖었으므로 예수님의 이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교훈에 주의할 것을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누룩은 악한 교훈과 부패의 상징으로 특히 은밀하고 간악하여 속으로 침투하는 악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는 종교적 형식주의와 위선과 불신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의 세속주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의 불신앙을 경계하신 것입니다.예수님의 책망(15-21)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책망하십니다. 떡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주의 깊게 숙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굳어져 그 마음이 완악해지면 이미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장성함을 기대하시는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히 5:12)”이라는 지적처럼 우리들의 영적 미성숙을 일깨워 주십니다. 벳새다 소경(22) 소경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온 사람들의 신분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확신있는 행동으로 보아 영적으로 귀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은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믿음에 대한 확신도 없어 자기를 데려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할 때에 잠잠히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절히 주를 찾는 적극적인 신앙이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치시는 예수님(23-25) 하지만 예수님은 이 소경을 특별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손을 붙드심으로 특별한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주셨고 평안한 마음으로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그의 믿음을 돕고자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눈을 적시고 안수하심으로 지극한 관심과 사랑으로 치유의 권능과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른 경우처럼 단 한 번에 치유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치유하신 독특한 모습은 자신의 회복을 직접 깨닫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시력은 일부분 밖에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반만 눈을 뜬 상태로 살아간다면 진리에 대해서나 세상의 고통의 죄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 할 것이지만 주님은 시력의 완전한 회복에 신중함과 정성스러움을 보이십니다. ‘다시 안수하시매’ 먼 곳의 물체도 식별 할 수 있는 완전한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축복을 받은 후 거룩케 하심의 은혜가 있음을 설명해주는 치유의 사건입니다. 보내시는 예수님(26) 예수님은 이적이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여 엄한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받은 은혜를 간증해야 할 경우 모든 감격과 기쁨을 절제하며 분별하여 무엇이 예수님께 유익이 될 것인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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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5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0, 2024 1월 21일 제자들의 여전한 불신, 한결같은 주님의 긍휼
    본문 : 막 8:1-13오늘 본문의 이적은 메시야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칠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구주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굶주린 영혼에 대한 주님의 연민을 봅니다.이적을 행하게 된 동기(1-3)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심으로 그 소문을 따라 많은 무리가 사흘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 문제는 ‘먹을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흘을 지낸 무리들은 기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문제를 의논하시며 무리들을 향한 긍휼과 동정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으로 인한 영적인 양식의 핍절 뿐만 아니라 육체적 필요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심(4-8)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부정적인 상황을 보고하고 무기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미 오천 명을 먹이셨던 일에 대한 교훈을 망각하고 결국 제자들은 환경적인 상황과 물질적인 상황의 문제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도우시고자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살펴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보이시기 전에 먼저 앉기를 명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질서 가운데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권능에 찬 주의 손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음식물을 제자들은 무리 앞에 차려 놓았습니다. 받은 바를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무리들 앞에 내려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드린 분량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 요구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한 은혜는 넉넉했습니다. 필요한 양 만큼만 제공되었던 구약의 만나와는 달리 예수님이 주신 음식은 모두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여 장차 베풀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풍성한 잔치를 바라보게 합니다. 무리를 흩어 보내심(9-10) 주님은 은혜를 받고 이적과 기사를 체험한 사람들을 그 자리에 그냥 머물게 하지 않고 흩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받고 훈련된 열 두 제자들을 복음을 위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사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안에서 은혜 받은 자들이 세상을 향해 흩어져야 할 사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모이는 것과 흩어지는 것이 균형을 이룰 때 하나님의 뜻은 원만하게 이루어집니다.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11-13)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논쟁의 장으로 끌어 들이고자 유도해 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기적이나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 이상의 그 무엇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증명되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불신케 함으로써 자기들의 유전을 떠나 예수님께 집중되는 백성들을 흩으려고 모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깊이 탄식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실망과 분노를 대변합니다. 이어서 그들의 불신앙을 향해 심판적 선언을 하십니다. 위선과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봉사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단호한 말로 거절하셨습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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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9, 2024 1월 20일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믿음
    본문 : 막 7장 24-37 절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불결하다고 여겨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정결 예법을 파기하고 이방인에 대한 신앙적 편견까지 허무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그 본질을 상실하지 않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것은 말씀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두로 지경으로 가심(24) 예수님은 두로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지만 이미 그 곳까지도 예수의 소문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진리와 빛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25-28)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과 헤롯의 악의를 피하여 게네사렛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인 두로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딸의 치유를 소망하며 담대히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여인은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거듭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우선권이 유대인들에게 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개’와 같이 취급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여인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개’라는 표현의 인격적 모멸감도 개의치 않고 은혜를 간구하는 여인의 겸손은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과 비교되어 이방여인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응답하심(29-30) 여인의 겸손하고도 끈기있는 간구로 예수님은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십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완전히 고쳐주셨음을 믿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마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집으로 돌아와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하시는 예수님(31) 시돈은 두로에서 북쪽으로 약 20-30마일 되는 거리에 있는 해안 도시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은거하신 이유는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자들을 피하시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32-35) 사람들이 예수 앞에 데리고 온 사람은 귀먹은 사람이었고 그로 인하여 말을 제대로 못하는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듣는 대로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피해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군중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피해 환자의 마음이 예수께 집중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의 치유 의지보다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온 피동적인 인격에게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마저 동참하기 원하시는 탄식의 간구로 자신의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십니다. 그의 가지신 바 모든 것을 쏟아 넣으시는 간절한 의지로 ‘에바다’라고 하셨을 때 이 명령은 환자의 심령뿐 아니라 닫혀진 귀와 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귀가 열리기를 원한다면 귀먹고 어눌했던 사람처럼 주님과 따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퍼지는 예수의 소문(36-37)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십니다. 단지 이적을 행하는 자로 잘못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오히려 더욱 예수님을 전파시켰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평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놀람과 칭송은 그들이 예수님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활동의 표시가 되면서 이방인 거주지까지 주의 나라가 확장될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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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8, 2024 1월 19일 정결한 행실의 근원, 정결한 내면
    본문 : 막 7:14-23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는 정결에 대한 관습이 율법의 본래 정신을 얼마나 상실하고 있는지를 반박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부정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결론적으로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위선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무리를 불러 이르심(14)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이제까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내적 정결이라는 대 주제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하시기 위하여 선지자적 부름으로 말씀을 시작하였습니다. 진정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달아야 할 말씀입니다.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하여(15-23) 전통적인 의식에 뿌리깊게 젖어 있었던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15-16절의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합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면 일반 백성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진정한 더러움은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결코 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것들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마음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12가지의 더러운 것을 언급하십니다. 개별적으로 관찰되는 사악한 행동은 성적 부도덕,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속임, 음탕, 시기, 훼방, 교만, 어리석음, 이 모든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고 내부에서,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마음에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더럽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더럽게 만드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와 같은 것을 마음에 두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장로들의 유전들만 잘 지켜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먹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줄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정결해지는 것은 오직 마음의 근본적인 변혁인 회개 뿐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관심의 초점을 외적인 것에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악한 마음을 깨끗게 해야 할 필요성에 그 관심을 두셨던 것입니다.마음을 깨끗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매사에 동기의 순수성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있게 펴나가야 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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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2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7, 2024 1월 18일 전통과 위선이 아닌 사랑의 계명
    본문 : 막 7:1-13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에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일종의 종교 조사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예수의 병 고침과 가르침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급파된 자들이었던 바, 사실상 그들의 소임은 진상 조사보다는 모함과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그에 따르는 행동과 생활방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유전으로 사는 삶(1-5)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신앙의 기준을 장로의 유전에 두고 모든 것을 보고 평가했습니다. 그들도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말씀을 듣고 사랑의 행위도 목격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큰 문제들이 주님 앞에서 해결받는 구원의 역사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참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은 끊임없이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생명에 사로잡히지 못한 영혼들은 형식에 붙잡혀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공박합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점차 성문 율법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권위는 백성들의 양심을 구속하게 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교훈의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후대에 와서는 성경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고 삶을 규제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으로 사는 삶(6-13) 주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에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함으로써(사29:13)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을 첨예하게 대립시켰습니다. 애초에 장로들의 유전이 생겨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만으로는 복잡하고 방대한 인생 제반사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에서 이탈된 계율들은 맹목적 권위를 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이 다른 용도로 쓰여질 수 없다는 뜻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으로 볼 때 제자들은 정죄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때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일은 하나님 앞에 헛된 일입니다. 이와같이 불효자가 자신의 재산은 다 고르반 되었다고 맹세한 후 그 일부만을 헌납하고 나머지를 자신의 소유로 삼고 부모 모시는 일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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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1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6, 2024 1월 17일 물 위를 걸으신 권능, 풍성한 긍휼의 치유 이적
    본문 : 막 6:45-56수많은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이 그 고대하던 메시야임을 확신했습니다. 자기 나라를 로마로부터 자유케 할 임금으로 생각했고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잡아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요6:15). 오늘 본문은 서둘러 벳새다로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이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에 둔감해져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45-46) 마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보여주신 기도의 습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분한 무리들을 보내시고 난 후에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아마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말미암은 사탄의 유혹이나 무리들이 보여주는 무지함 등을 위해 기도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거의 자정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심(47-52) 해수면보다 낮은 갈릴리 바다의 지형적인 영향으로 강한 폭풍이 불어오자 제자들은 바다에서 방향을 잃어 버렸습니다. 밤 사경이 되도록 폭풍우와 싸우는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령인줄 알고 놀라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들의 두려움을 잠잠케 하시고 확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만난 사람을 위로하시며 내적 평안을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바람이 그치는 것을 보고 놀란 제자들을 두고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 예수님의 참 모습을 깨닫지 못했습니다.게네사렛에서의 사역(53-56) 제자들과 함께 게네사렛에 도착했을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데리고 모여 들었습니다. 주님은 극히 단순한 신앙에도 은혜로 응답해 주시며 옷가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병고침과 생명을 얻기에 넉넉한 치유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열 두 해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보여준 믿음의 모본은 질병을 앓던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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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0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5, 2024 1월 16일 참된 목자가 베푸신 광야의 식탁
    본문 : 막 6장 30-44절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가 다같이 전하는 유일한 기사로서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중에 절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리할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영혼과 육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기사입니다.열 두 제자들이 돌아옴(30-31) 전도활동을 위하여 파송되었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활동 내용을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휴식을 취할 것을 명하십니다. 보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신체적, 영적 원기를 회복할 재충전의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적한 곳’은 갈릴리의 큰 도시였던 가버나움 건너편 쪽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거할 수 있는 따로 떨어진 지역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원어적 표현으로 볼 때 사람의 출입이 많지 않았던 ‘광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출애굽 한 후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하며 노예로서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휴식하였던 곳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사 63:14)와 예레미야(렘31:2)때에 이 곳이 또 다시 선민 이스라엘에게 영적 휴식을 제공할 장소로 예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쉬어야 할 한적한 곳은 어디입니까?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32-44) 열 두 제자들의 성공적인 선교의 결과로 인해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선지를 예견하고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무리의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못해 굶주린 영혼들에게 풍성한 영의 양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저녁끼니를 걱정하여 마을로 돌아가게 하자는 제자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난색을 표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질서있게 앉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둘러 앉은 무리의 수에 비하면 어림도 없이 모자른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기다리는 무리들 사이를 오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수에서 제외하고 남자들만 세어서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배불리 먹었는데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 기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교훈하십니다(요6:47-58).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주심으로 뭇 심령들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시고자 하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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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9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4, 2024 1월 15일 불의에 맞선 의로운 죽음
    본문 : 마가복음 6:14-29  열두 제자의 전도로 예수의 능력과 구원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본문은 이 예수의 소문으로 인해 당황하는 헤롯왕과 헤롯왕에 의해 죽음을 당한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예고해 줍니다. 헤롯과 예수의 소문(14-16) 헤롯은 예수님의 권능있는 사역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보인 비윤리적인 행동에 비판을 가한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늘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 상태에 있었습니다. “내가 목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선지자나 엘리야가 다시 온 것으로 여겼으나 헤롯은 자기가 죽인 요한이 틀림없이 살아났다고 믿고 당황했습니다. 헤로디아의 잔혹함과 헤롯의 우매함(17-28)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아리스토 볼로스’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의 형제이자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부도덕성을 비판하여 투옥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공공연히 헤롯의 잘못과 불의를 지적하자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기고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 큰 죄악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인 헤롯은 두 사람 가운데 번민을 하였으나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죄에서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처신하였습니다.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에게 맹세한 것을 더 귀히 여기는, 자신의 체면 유지에 급급합니다.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린 인간의 잔인성과 세상의 쾌락을 따르는 자들이 맞게 되는 범죄의 필연성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장례(29) 진리와 정의를 받아들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올무가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담대히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증거대로 그 자신은 쇠하여야 하겠고, 예수는 흥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고 정치가의 부도덕함을 질타했던 선지자의 외침이 죽음으로 끝난것 같으나 이 일은 헤롯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었고 끝임없이 따라 다녔습니다(마14:1-11).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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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8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3, 2024 1월 14일 권능을 가로 막는 편견, 권능으로 전하는 복음
    본문 : 마가복음 6장 1-13절본장은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사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 장면입니다.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 당하신 사건을 기점으로 제2차 갈릴리 사역이 끝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의 놀라운 능력으로 인해 환호하는 군중들과 그럴수록 더해가는 권세자들의 시기와 대적으로 이어져갑니다. 고향에서의 배척(1-6) 예수님을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미천한 목수의 아들로만 아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여주신 지혜와 행하신 권능에 놀라움과 함께 의심의 눈초리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님을 불신하고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권세있는 가르침과 기사와 이적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나사렛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은, 선지자가 그를 알고 있는 고향과 친척, 가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건전한 경쟁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겸손과 사랑의 시각으로 바꿀 때 서로 존경과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와 사랑이 결여되고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고 시도하지도 않으셨습니다.열 두 제자의 파송(7-13) 복음전파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때에 이미 주어졌습니다. 말씀과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을 양육해 오신 예수님은 이제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서로 도우며 증인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둘씩 짝을 지어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 후 파송하신 것입니다. 복음전파 사역은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 외에는 지니지 말고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만을 가지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전파해야 할 복음 외에는 신변에 대한 염려를 일체 하지 말 것과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전도자는 항상 청빈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자기 소유를 의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사역지에 가서는 합당한 자의 집에 머무를 것과 더 나은 거처를 위해 옮겨 다녀서는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의시키십니다.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에서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처럼 단호히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준행할 때 제자들은 회개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 놀라운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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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7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2, 2024 1월 13일 믿음의 사람이 맛보는 치유와 새 생명의 은혜
    본문 :  마가복음 5장 21-43절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다시 건너 가버나움 가까운 곳에 내리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은혜를 애타게 구하는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은 치유의 역사를 보여 주셨습니다.회당장 야이로의 간구(21-24)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신 줄 알았으며 깊이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딸이 병들어 죽게 되자 주의 발아래 겸손히 엎드려 자기의 소원을 간구했습니다. “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기도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예수님을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야이로의 행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진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대로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심(25-34)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재산을 들이고 신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병고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2년의 세월 동안 병이 낫기는 커녕 도리어 더 중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중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부정한 자는 대중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사회적,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원자이심을 믿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내민 손에 전능자의 능력이 들어와 혈루의 근원을 마르게 하였고 병고침의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4)란 표현으로서 병의 증상이 없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근원이 곧 말랐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병이 근본적으로 치료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12년 간 여인을 괴롭혔던 병이 그 여인의 믿음대로 그 근원부터 일순간에 치료된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이 치료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으리라”는 그 여인의 은밀한 행동을 사람들은 몰랐으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오늘도 사람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고침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믿음을 예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주님은 평강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체하심과 딸의 죽음(35-36) 저자는 “아직 말씀하실 때”라는 표현으로 딸의 죽어감을 안타까워 하는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체하셨음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집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더 구할 필요없이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열 두 해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 대도 나을 줄로 믿었던 그런 믿음을 본받을 것에 대한 촉구가 담겨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괴로워하고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죽은 자를 살리심(37-43)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들을 특별히 훈련하셔서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은 이미 초상집 분위기로 소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며 “잔다”는 말씀으로 부활의 소망을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 비웃는 무리들은 내보내졌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생명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절망의 늪에 잠긴 영혼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달리다굼”이라고 소녀가 알아듣는 언어인 아람어로 부르시고 깨우셨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도록 깨우시는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치유의 결과는 즉각적이었으며 생명은 물론 원기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사역이 이 일로 인해 방해받길 원치 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세상사에 종지부(.)를 찍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종지부에 꼬리를 붙혀 쉼표(,)를 만드십니다. 인간의 절망에 새로운 시작을 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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