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환 원로목사 03/26/17 울고만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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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웃을 일도 많지만 웃을 일 보다는 울 일이 더 많습니다. 사람 살기가 옛날 보다는 분명 더 좋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문명의 이기들을 지금 얼마나 많이 누리고 삽니까? 그런데 왜 웃을 일 보다 울 일이 더 많은 것일까요? 한 마디로 내가 원하는 필요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생 건강하면 좋겠는데 갑자기 몹쓸 병이 찾아왔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은데 비즈니스가 잘 안되어 이 달에도 적자가 났습니다.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남편이 속을 썩입니다. 이렇게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서 우는 것입니다.
지난전주 금요일 어떤분을 만나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정말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울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사정을 듣는 내 가슴이 울어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의 개인사를 다 알지는 못해도 목사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울어야 할 사람은 울지 않고 오히려 울지 않아야할 사람이 울고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감사하지 않고 전혀 감사할 일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헌신하고 봉사해야할 사람은 하지 않고 시간과 물질적으로는 도저히 헌신하고 봉사할 수 없는 사람이 언제나 앞장섭니다. 그래서 저는 울지 않아야할 사람이 우는 것을 볼 때 안타깝고, 울어야 할 사람이 울지 않는 것을 볼 때는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여기 운다는 말은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웃는다는 말도 희희낙락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즉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기 내면에서 나타나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 상태를 말합니다.
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울어야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슬피 우실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울기 전에 먼저 왜 내가 울어야 하는지,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기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 지금의 위치가 주 안에서인지 주 밖에서인지, 혹시 울어야 하는 것이 내 인간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인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울어야할 형편에도 울지 않고 왜 울지 않아야할 상황인데도 우는 것입니까? 결국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채움보다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저 멀리 예비되어져 있는 영원한 채움을 바라봅니다. 남편이 속을 썩여도, 아내가 내 맘을 몰라줘도 그것가지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이유는 감싸 안고 건너 띄는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너무 힘들고 괴로워 심히 울며 통곡한 사람이 나옵니다. 제사장 엘가나의 아내 한나입니다. 본부인인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내인 브닌나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브닌나가 의기양양해서 한나를 멸시하고 괴롭힙니다. 한나가 처한 상황은 울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의 마음에 이렇게 울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544장에 보면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믿으면 하겠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 답답하고 괴로울 때 해야 할 일은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웃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내 내면 속에서 나로 하여금 울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문제가 우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를 분별하고 한나처럼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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