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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환 원로목사 05/28/17 의와 진실이 근거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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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2,928회 작성일 17-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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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5월을 가리켜 가정의 달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어떤 이권이나 영리를 목적으로 모인 곳이 아닙니다. 가족으로 구성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가정에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동시에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바다와 같이 넓고 하늘같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그 어떤 심해(心海)보다 더 깊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요?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혈연적 관계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하고, 혈육의 정은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하늘의 인연으로 정하여져 있는 혈연적 관계로서 천륜(天倫)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성도들의 관계 또한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들의 부모공경을 통해 하나님사랑을 가르쳐주셨고 동시에 부모의 자녀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할 때 우리는 무조건 이해하고 감싸주고 덮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이라는 단어는 <감싸주고 덮어주고 이해한다.>는 포괄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이해하고 감싸주고 덮어주는 것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의 매 또는 사랑의 채찍>이라는 말이 있듯이 때로는 회초리도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 곧 자기 친아들이 아니다”(히 12:8)라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무려 13년 동안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시고는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런 무관심도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관심도 사랑일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못 본체 넘어가는 것도 사랑일 수 있고, 고난을 통한 징계도 사랑일 수 있으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하나님사랑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달리 영혼을 살리고 죽이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초리를 맞아 잠시 고통이 따르고, 육체적인 죽음에 직면하더라도 그 영혼이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 안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감싸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로 인정받는 삼 요소에 말씀과 성찬과 더불어 권징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룬 은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즉 의와 진실이 근거되지 않은 사랑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적이지 않고 가식적이지 않은 것이라야 합니다.

복음서를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도 가식적으로 누구를 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나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피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고 속에 담아두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가식적인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에서가 아닌 체면이나 자기유익을 위해 속마음은 꽁꽁 숨겨놓고 외적으로만 사랑하는 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도 그래본 적이 많습니다. 사랑은 진실이 근거되어야 합니다. 공의의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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