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환 원로목사 07/03/16 배려와 헤아림이 없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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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자동차 개스를 넣기 위해 집 부근에 있는 코스코에 갔습니다. 주말이라 많은 자동차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제 앞에서 아시안으로 보이는 40대 중반의 한 여인이 개스를 다 넣은 뒤 자동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도 출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겠지! 하고 한 참을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전화를 걸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건 아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어느 나라 사람인지 궁금해졌습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알고 보니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줄서서 기다리는 앞뒤 주위사람들에게 제가 괜히 미안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찍부터 예절바른 민족으로 알려져 온 우리 한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헤아림이 없어진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식당에 가도 그렇고, 마켙에 가도 그렇고,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가 없고 헤아림이 없습니다. 나중에 올 사람은 생각지 않고 자기만 싱싱하고 좋은 것을 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개의 사과박스를 열어 좋은 것만 골라서 담아가는데 그분이 어느 교회인지는 몰라도 알고 보면 권사직분 가진 사람이고,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 빨리 안 준다고 큰 소리 치며 종업원을 닥달하는 사람들 중에도 장로와 목사들이 많은데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중요한 삶의 자세중의 하나가 배려와 헤아림이라고 생각됩니다. 상대방을 헤아리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더불어 사는 삶 속에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형태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은 삶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배려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성숙한 인격자로 만들고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기신앙을 성숙하게 해줍니다.
성경에도 배려와 헤아림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헤아린다는 말은 헬라어로 <케트로>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곡물 등을 넣고 측량하는 되나 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장사꾼이 손님을 속이려고 작은되나 작은말을 사용하여 손님에게 불이익을 끼치면 나중에 자신도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이웃을 대하였는가에 따라 똑 같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때 상대방도 나를 너그럽게 대해줄 것이고 동시에 내 인격은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말 한 마디라도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나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일 뿐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헤아려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죄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면서 심판의 자리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품을 떠난 원수 같은 우리의 처지를 헤아려 살리시고자 자기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은 우리 또한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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