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7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매일묵상

Total 804건 7 페이지
  • 71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9, 2024 1월 20일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믿음
    본문 : 막 7장 24-37 절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불결하다고 여겨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정결 예법을 파기하고 이방인에 대한 신앙적 편견까지 허무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그 본질을 상실하지 않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것은 말씀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두로 지경으로 가심(24) 예수님은 두로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지만 이미 그 곳까지도 예수의 소문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진리와 빛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25-28)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과 헤롯의 악의를 피하여 게네사렛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인 두로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딸의 치유를 소망하며 담대히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여인은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거듭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우선권이 유대인들에게 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개’와 같이 취급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여인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개’라는 표현의 인격적 모멸감도 개의치 않고 은혜를 간구하는 여인의 겸손은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과 비교되어 이방여인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응답하심(29-30) 여인의 겸손하고도 끈기있는 간구로 예수님은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십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완전히 고쳐주셨음을 믿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마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집으로 돌아와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하시는 예수님(31) 시돈은 두로에서 북쪽으로 약 20-30마일 되는 거리에 있는 해안 도시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은거하신 이유는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자들을 피하시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32-35) 사람들이 예수 앞에 데리고 온 사람은 귀먹은 사람이었고 그로 인하여 말을 제대로 못하는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듣는 대로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피해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군중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피해 환자의 마음이 예수께 집중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의 치유 의지보다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온 피동적인 인격에게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마저 동참하기 원하시는 탄식의 간구로 자신의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십니다. 그의 가지신 바 모든 것을 쏟아 넣으시는 간절한 의지로 ‘에바다’라고 하셨을 때 이 명령은 환자의 심령뿐 아니라 닫혀진 귀와 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귀가 열리기를 원한다면 귀먹고 어눌했던 사람처럼 주님과 따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퍼지는 예수의 소문(36-37)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십니다. 단지 이적을 행하는 자로 잘못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오히려 더욱 예수님을 전파시켰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평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놀람과 칭송은 그들이 예수님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활동의 표시가 되면서 이방인 거주지까지 주의 나라가 확장될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13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8, 2024 1월 19일 정결한 행실의 근원, 정결한 내면
    본문 : 막 7:14-23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는 정결에 대한 관습이 율법의 본래 정신을 얼마나 상실하고 있는지를 반박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부정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결론적으로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위선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무리를 불러 이르심(14)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이제까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내적 정결이라는 대 주제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하시기 위하여 선지자적 부름으로 말씀을 시작하였습니다. 진정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달아야 할 말씀입니다.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하여(15-23) 전통적인 의식에 뿌리깊게 젖어 있었던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15-16절의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합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면 일반 백성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진정한 더러움은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결코 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것들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마음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12가지의 더러운 것을 언급하십니다. 개별적으로 관찰되는 사악한 행동은 성적 부도덕,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속임, 음탕, 시기, 훼방, 교만, 어리석음, 이 모든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고 내부에서,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마음에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더럽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더럽게 만드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와 같은 것을 마음에 두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장로들의 유전들만 잘 지켜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먹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줄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정결해지는 것은 오직 마음의 근본적인 변혁인 회개 뿐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관심의 초점을 외적인 것에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악한 마음을 깨끗게 해야 할 필요성에 그 관심을 두셨던 것입니다.마음을 깨끗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매사에 동기의 순수성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있게 펴나가야 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12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7, 2024 1월 18일 전통과 위선이 아닌 사랑의 계명
    본문 : 막 7:1-13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에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일종의 종교 조사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예수의 병 고침과 가르침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급파된 자들이었던 바, 사실상 그들의 소임은 진상 조사보다는 모함과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그에 따르는 행동과 생활방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유전으로 사는 삶(1-5)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신앙의 기준을 장로의 유전에 두고 모든 것을 보고 평가했습니다. 그들도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말씀을 듣고 사랑의 행위도 목격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큰 문제들이 주님 앞에서 해결받는 구원의 역사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참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은 끊임없이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생명에 사로잡히지 못한 영혼들은 형식에 붙잡혀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공박합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점차 성문 율법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권위는 백성들의 양심을 구속하게 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교훈의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후대에 와서는 성경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고 삶을 규제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으로 사는 삶(6-13) 주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에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함으로써(사29:13)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을 첨예하게 대립시켰습니다. 애초에 장로들의 유전이 생겨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만으로는 복잡하고 방대한 인생 제반사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에서 이탈된 계율들은 맹목적 권위를 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이 다른 용도로 쓰여질 수 없다는 뜻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으로 볼 때 제자들은 정죄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때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일은 하나님 앞에 헛된 일입니다. 이와같이 불효자가 자신의 재산은 다 고르반 되었다고 맹세한 후 그 일부만을 헌납하고 나머지를 자신의 소유로 삼고 부모 모시는 일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11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6, 2024 1월 17일 물 위를 걸으신 권능, 풍성한 긍휼의 치유 이적
    본문 : 막 6:45-56수많은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이 그 고대하던 메시야임을 확신했습니다. 자기 나라를 로마로부터 자유케 할 임금으로 생각했고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잡아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요6:15). 오늘 본문은 서둘러 벳새다로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이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에 둔감해져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45-46) 마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보여주신 기도의 습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분한 무리들을 보내시고 난 후에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아마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말미암은 사탄의 유혹이나 무리들이 보여주는 무지함 등을 위해 기도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거의 자정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심(47-52) 해수면보다 낮은 갈릴리 바다의 지형적인 영향으로 강한 폭풍이 불어오자 제자들은 바다에서 방향을 잃어 버렸습니다. 밤 사경이 되도록 폭풍우와 싸우는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령인줄 알고 놀라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들의 두려움을 잠잠케 하시고 확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만난 사람을 위로하시며 내적 평안을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바람이 그치는 것을 보고 놀란 제자들을 두고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 예수님의 참 모습을 깨닫지 못했습니다.게네사렛에서의 사역(53-56) 제자들과 함께 게네사렛에 도착했을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데리고 모여 들었습니다. 주님은 극히 단순한 신앙에도 은혜로 응답해 주시며 옷가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병고침과 생명을 얻기에 넉넉한 치유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열 두 해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보여준 믿음의 모본은 질병을 앓던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10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5, 2024 1월 16일 참된 목자가 베푸신 광야의 식탁
    본문 : 막 6장 30-44절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가 다같이 전하는 유일한 기사로서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중에 절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리할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영혼과 육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기사입니다.열 두 제자들이 돌아옴(30-31) 전도활동을 위하여 파송되었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활동 내용을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휴식을 취할 것을 명하십니다. 보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신체적, 영적 원기를 회복할 재충전의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적한 곳’은 갈릴리의 큰 도시였던 가버나움 건너편 쪽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거할 수 있는 따로 떨어진 지역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원어적 표현으로 볼 때 사람의 출입이 많지 않았던 ‘광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출애굽 한 후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하며 노예로서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휴식하였던 곳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사 63:14)와 예레미야(렘31:2)때에 이 곳이 또 다시 선민 이스라엘에게 영적 휴식을 제공할 장소로 예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쉬어야 할 한적한 곳은 어디입니까?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32-44) 열 두 제자들의 성공적인 선교의 결과로 인해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선지를 예견하고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무리의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못해 굶주린 영혼들에게 풍성한 영의 양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저녁끼니를 걱정하여 마을로 돌아가게 하자는 제자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난색을 표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질서있게 앉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둘러 앉은 무리의 수에 비하면 어림도 없이 모자른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기다리는 무리들 사이를 오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수에서 제외하고 남자들만 세어서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배불리 먹었는데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 기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교훈하십니다(요6:47-58).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주심으로 뭇 심령들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시고자 하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9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4, 2024 1월 15일 불의에 맞선 의로운 죽음
    본문 : 마가복음 6:14-29  열두 제자의 전도로 예수의 능력과 구원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본문은 이 예수의 소문으로 인해 당황하는 헤롯왕과 헤롯왕에 의해 죽음을 당한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예고해 줍니다. 헤롯과 예수의 소문(14-16) 헤롯은 예수님의 권능있는 사역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보인 비윤리적인 행동에 비판을 가한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늘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 상태에 있었습니다. “내가 목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선지자나 엘리야가 다시 온 것으로 여겼으나 헤롯은 자기가 죽인 요한이 틀림없이 살아났다고 믿고 당황했습니다. 헤로디아의 잔혹함과 헤롯의 우매함(17-28)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아리스토 볼로스’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의 형제이자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부도덕성을 비판하여 투옥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공공연히 헤롯의 잘못과 불의를 지적하자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기고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 큰 죄악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인 헤롯은 두 사람 가운데 번민을 하였으나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죄에서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처신하였습니다.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에게 맹세한 것을 더 귀히 여기는, 자신의 체면 유지에 급급합니다.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린 인간의 잔인성과 세상의 쾌락을 따르는 자들이 맞게 되는 범죄의 필연성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장례(29) 진리와 정의를 받아들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올무가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담대히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증거대로 그 자신은 쇠하여야 하겠고, 예수는 흥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고 정치가의 부도덕함을 질타했던 선지자의 외침이 죽음으로 끝난것 같으나 이 일은 헤롯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었고 끝임없이 따라 다녔습니다(마14:1-11).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8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3, 2024 1월 14일 권능을 가로 막는 편견, 권능으로 전하는 복음
    본문 : 마가복음 6장 1-13절본장은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사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 장면입니다.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 당하신 사건을 기점으로 제2차 갈릴리 사역이 끝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의 놀라운 능력으로 인해 환호하는 군중들과 그럴수록 더해가는 권세자들의 시기와 대적으로 이어져갑니다. 고향에서의 배척(1-6) 예수님을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미천한 목수의 아들로만 아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여주신 지혜와 행하신 권능에 놀라움과 함께 의심의 눈초리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님을 불신하고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권세있는 가르침과 기사와 이적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나사렛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은, 선지자가 그를 알고 있는 고향과 친척, 가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건전한 경쟁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겸손과 사랑의 시각으로 바꿀 때 서로 존경과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와 사랑이 결여되고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고 시도하지도 않으셨습니다.열 두 제자의 파송(7-13) 복음전파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때에 이미 주어졌습니다. 말씀과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을 양육해 오신 예수님은 이제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서로 도우며 증인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둘씩 짝을 지어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 후 파송하신 것입니다. 복음전파 사역은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 외에는 지니지 말고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만을 가지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전파해야 할 복음 외에는 신변에 대한 염려를 일체 하지 말 것과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전도자는 항상 청빈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자기 소유를 의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사역지에 가서는 합당한 자의 집에 머무를 것과 더 나은 거처를 위해 옮겨 다녀서는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의시키십니다.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에서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처럼 단호히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준행할 때 제자들은 회개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 놀라운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7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2, 2024 1월 13일 믿음의 사람이 맛보는 치유와 새 생명의 은혜
    본문 :  마가복음 5장 21-43절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다시 건너 가버나움 가까운 곳에 내리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은혜를 애타게 구하는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은 치유의 역사를 보여 주셨습니다.회당장 야이로의 간구(21-24)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신 줄 알았으며 깊이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딸이 병들어 죽게 되자 주의 발아래 겸손히 엎드려 자기의 소원을 간구했습니다. “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기도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예수님을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야이로의 행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진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대로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심(25-34)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재산을 들이고 신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병고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2년의 세월 동안 병이 낫기는 커녕 도리어 더 중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중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부정한 자는 대중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사회적,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원자이심을 믿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내민 손에 전능자의 능력이 들어와 혈루의 근원을 마르게 하였고 병고침의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4)란 표현으로서 병의 증상이 없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근원이 곧 말랐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병이 근본적으로 치료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12년 간 여인을 괴롭혔던 병이 그 여인의 믿음대로 그 근원부터 일순간에 치료된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이 치료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으리라”는 그 여인의 은밀한 행동을 사람들은 몰랐으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오늘도 사람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고침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믿음을 예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주님은 평강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체하심과 딸의 죽음(35-36) 저자는 “아직 말씀하실 때”라는 표현으로 딸의 죽어감을 안타까워 하는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체하셨음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집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더 구할 필요없이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열 두 해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 대도 나을 줄로 믿었던 그런 믿음을 본받을 것에 대한 촉구가 담겨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괴로워하고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죽은 자를 살리심(37-43)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들을 특별히 훈련하셔서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은 이미 초상집 분위기로 소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며 “잔다”는 말씀으로 부활의 소망을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 비웃는 무리들은 내보내졌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생명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절망의 늪에 잠긴 영혼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달리다굼”이라고 소녀가 알아듣는 언어인 아람어로 부르시고 깨우셨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도록 깨우시는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치유의 결과는 즉각적이었으며 생명은 물론 원기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사역이 이 일로 인해 방해받길 원치 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세상사에 종지부(.)를 찍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종지부에 꼬리를 붙혀 쉼표(,)를 만드십니다. 인간의 절망에 새로운 시작을 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6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1, 2024 1월 12일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
    본문 : 마가복음 5장 1-20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에 오신 예수님은 군대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절망 가운데 있는,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거라사 지방에 오신 예수님(1)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4장 35절에서 제자들에게 “저 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풍랑이 일어났습니다(막4:37-41).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원래 목적하시던 호수 동편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이 지방은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자의 모습(2-5)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를 삼고 밤낮으로, 어디서든지 괴성을 지르며 돌로 자해 행위를 일삼아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었습니다. 발에 고랑을 채우고 손에 사슬을 묶어도 끊어 버립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이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그의 거처는 죽음 사이입니다. 세상의 윤리나 도덕으로도 죄성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을 학대하는 결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귀신에 사로 잡히는 것은 단순한 질병이나 정신이상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고 파괴하려는 필사적인 사탄의 시도입니다. 귀신에게 명령하심(6-10) 귀신들린 자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과 초월적인 권능을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크게 소리 지르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빛 앞에서 숨어있던 자신의 존재가 폭로되었고 무서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군대’였습니다.  ‘군대’는 ‘군단’이라는 뜻으로 보통 1개 군단의 병사가 6000명 가량 됩니다. 이처럼 많은 귀신이 한 삶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집단 거주하고 행동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칩니다. 다시 예수님은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오라고 할때 꼼짝없이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왔고 돼지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는 권세와 능력을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도 주셨습니다(막3:14-15).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 안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돼지떼의 손실(11-13)  유대인들은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생각했으나 거라사 지역은 이방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에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상대로 돼지사육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행하는 유대인의 이중적이며 외식적인 삶을 보여 줍니다. 무엇이든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귀신들은 사람을 파괴할 수 없게 되자 돼지에게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청하였고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귀신들이 그 사람을 떠나서 돼지떼로 들어가자 돼지떼 전체가 호수에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온전하여졌습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파괴된 인격, 절망적인 영혼에게 찾아 오셔서 완전한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두 종류의 사람(14-20)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하여 마을에 이 놀라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해 달려와 확인해보니 전에 귀신들렸던 자가 온전하여져서 옷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보다는 경제적 손실에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만일 예수님께서 더 머물러 있으신다면 더 많은 손실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떠나가시기를 종용합니다. 반면에 귀신 들렸던 자는 은혜를 감사하며 봉사의 태도를 보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의 가치가 이천마리 돼지보다 소중하고 가치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시려고 할 때 그는 주님과 함께 가기를 간청하지만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네 친족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의 삶을 통하여 가정과 사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 전도와 봉사하는 일에 신속하게 앞서야 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5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0, 2024 1월 11일 창대해지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 토치자의 권능
    본문 : 마가복음 4:30-41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풍랑이 심한 인생길과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항해하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겨자씨의 비유(30-32) 주님은 작은 겨자씨를 비유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산되어 나아가는지를 말씀하시고, 믿음이 비록 작고 보잘것 없게 시작된다 할지라도 나중에는 위대한 것으로 성숙해 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어 그를 온 인류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듯이 나사렛의 예수께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33-34) 비유의 목적은 듣는 이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6;16:13).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요합니다. 항해를 명하시는 그리스도(35-36)  주님이 명하신 방향은 바다 건너편인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있는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편은 우리를 기다리는 선교의 현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제자들은 바다를 항해하면서도 몰랐고, 폭풍 속에서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쉼이 있던지 더욱 큰 일이 기다리던지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풍랑이 일어남(37-38)  갑자기 일어난 돌풍과 심한 파도로 인해 배에 탔던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바다에서 자란 어부들이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과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노력하였으나 워낙 거센 광풍이라 그들의 힘으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채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죽음에 부딪힐 때 사람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오직 주께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급하게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풍랑을 잠잠케 하신 그리스도(39-41)  주님은 배가 흔들리고 요동하는 중에도 주무셨으나 제자들이 깨우자 지체없이 일어나서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꾸짖어 잠잠케 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의 손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풍랑이 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며 약한 믿음은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걱정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풍랑이 있을 것을 주님은 미리 아셨을 것입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주목하십시오. 인간이 절망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9, 2024 1월 10일 감춰지지 않는 복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본문 : 누가복음 4;21-29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등불의 비유(21-25) 등불은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하여 빛을 지닌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셔도 자신을 숨길 수 없었던 것 같이 우리도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속한 사회의 한 가운데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실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비밀의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빛가운데 살며 빛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없고 허물없이 살아야 합니다. 회개 잘하는 사람, 이웃의 마음을 밝혀 주는 사람,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스스로 열매맺는 땅의 비유(26-29) “씨가 나서 자라되”라는 비유는 복음에는 싹을 내고 자라게 하는 생명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와같이 주의 복음에는 사람의 마음에 뿌려지면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 구원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성장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씨앗은 잠재력을 드러냅니다. 작은 한 알 속에 크고 아름다운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둘째,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내가 요구됩니다. 셋째,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개인의 영적 성장이나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 사역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심판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3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8, 2024 1월 09일 백배 열매 맺는 좋은 땅, 좋은 마음
    본문 : 마가복음 4:1-20주님은 비유를 통해서 많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비유들은 일상 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들이었습니다.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농부는 그리스도 입니다. 밭은 사람의 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마음 밭의 네 가지 상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길 가(4,15)  길가와 같은 마음은 신앙을 인격적으로 받지 않고 교리와 이론으로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사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당시 유대교적 전통만 고집하고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유대교 지도자를 일컫고 말씀을 배척하는 모든 불신자를 말합니다. 말씀은 듣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돌 밭(5,16)  신앙을 종교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는 자들의 심령 상태를 말합니다. ‘돌밭’의 상태란 숨겨져 있거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나 죄성이 남아있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인하여 핍박이나 환란이 올 때 넘어집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은 사람만이 시험이나 환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뽑히지 않은 죄성은 무엇인가요? 가시떨기(7,18)  이들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습니다(약1:8). 그러므로 세상의 염려, 물질의 유혹, 세속적인 향락에 육신의 정욕이 이끌려 힘있는 신앙인으로 성장을 못합니다. “기운을 막으므로”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영적 성장의 기운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밭(8,20)  누가복음에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눅8:15)라고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이들은 큰 기쁨과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결실, 즉 영적인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환경과 여건에 상관없이 말씀을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여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2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7, 2024 1월 08일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
    본문: 마가복음 3:20-35  열두 제자를 세우신 후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에서의 사역에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식사하실 시간마저 없을 정도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도 강해져 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입니다.오해와 비난(20-22)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사뭇 다르다 못해 반대에 가까운 메세지를 전하셨으며, 종교적 경건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자들 중에서 제자를 선택하는 등 허물 많고 소외된 무리들과 주로 어울리셨을 뿐만 아니라 기이한 능력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바라보지 않는 무리들의 눈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이 결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 마저도 예수님을 한 미치광이로 보는 항간의 소문에 동조하여 그의 활동을 자제시키기 위해 찾아나섰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산되어 가는데 불안함을 느낀 나머지, 예수님의 능력이 사단에게서 말미암는다고 공공연히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고수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설명과 경고(23-30) 소위 지식인들이라 하는 서기관들의 억지 주장에 대해 예수님은 논리적으로 답변하셨습니다. 먼저 자신이 사단과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단을 결박하고 사단의 세력을 꺾고 있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후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엄히 경고하십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는 말의 의미를 좀더 설명했습니다. 모든 죄가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면 성자는 구속사업을 이루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부인하고 훼방한다면 어찌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참 가족(31-35) 혈연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갈등 속에는 부모가 자녀를, 형제가 형제를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을 예수님이 경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영적 관계를 교훈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1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6, 2024 1일 07일 하나님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제자들
    본문 : 막 3 : 7-12예수께서 점증되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잠시 갈릴리 호수 어느 지점으로 피하셨던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구하러 오신 분이 심한 배척으로 끝내 몸을 피해야만 하는 모순된 상황은 예수의 죽음으로까지 비화되어 갔습니다. 예수께서 몸을 피하신 것은 사람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을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뿐아니라 예수님은 여러번 몸을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고난 주간에는 오히려 자원하여 죽음의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은거 기사로서 1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각처에서 군중들이 몰려듬(7-8)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지도계층에서의 적대감이 점점 가중되자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바닷가의 한적한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 가운데 둘러 쌓이셨습니다. 허다히 몰려든 무리들의 출신지는 예수님이 주로 계시던 가버나움이나 갈릴리 지방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남쪽 지방인 예루살렘과 이두매, 동쪽 지방인 요단강 건너편, 북서쪽 지방인 두로와 시돈 등 팔레스타인 전역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벌써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고치심(9-10) ‘핍근히 함’이란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과 접촉하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되었는지 맹렬하게 달려들며 밀어대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은 그들과 간격을 두시기 위해 작은 배를 해변 가까이 준비시키시고 그 위에 오르셔야만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유한한 육신의 문제만을 들고 나와 아우성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심으로 저들의 육신의 필요에도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귀신들에게 함구를 명하심(11-12)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을 보고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면서도 대적하기를 일삼고 있는 귀신들에게는 장차 멸망의 심판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귀신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많이 경계’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엄중히 꾸중’하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귀신들의 놀람과 정확한 고백이 결코 그들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본질에 대해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요8: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그들에게는 영원한 심판만이 예비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선전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부르셨나(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들 각자의 외적 조건이나 열정 등을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획에 따라 원하시는 자를 선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한 예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고만 하였는데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12은 산에 오르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주저없이 즉각적으로 순응하였습니다.왜 부르셨나(14-15)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면서 그에게 배워야 했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 공생애의 후반부의 대부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훈련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보내심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들은 보냄을 받은 자, 곧 ‘사도’로서 예수님을 대신할 자들인 것입니다. 셋째,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권세는 본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능이었으나 이제 제자들에게 부여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자신의 사역에 동참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16-19)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신하는 위치인 열 두 사도의 사회적 신분이나 교육 수준, 인품 등을 보면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열 두 명중 네 명은 어부고 한 명은 사회의 멸시와 비난의 대상인 세리이며 또 한 명은 과격한 열심당원, 나머지 여섯 명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장래의 그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따라, 혹은 성품을 따라 새로운 이름을 주셔서 그들을 격려하시기도 하셨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 700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5, 2024 1월 6일 사람을 우선시하고 선을 행하는 안식일
    본문 : 마가복음 2:23-3:6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제정의 의도와 목적을 시원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안식일 규정(23-24) 율법주의자들은 꽤나 까다롭게 율법의 항목들을 규정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안식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상세하게 규정하였습니다. 물론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 스스로 규정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세의 율법에는 그런 자세한 조항들이 없습니다. 마침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시장끼를 느껴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 일을 바리새인들이 발견하고 그들의 율법 조항을 근거로 제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추수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석(25-28)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에 잘못이 없다고 변호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판례로써 다윗의 예를 들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하던 다윗은 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에게 생명의 유지를 위한 떡을 구하였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은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진설병은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의 행동은 정당하였습니다. 죽을 위기에 있는 자를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특별한 예외 조항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의 목적(3:1-6) 안식일에 대한 자기들의 규정을 근거로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나 엿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의술행위였으며 그 역시 안식일에 행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고자 안식일에 대한 진리를 설파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요, 생명을 구하는 날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하나님이 회당에 오셨고 죽을 가련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목적과 정반대로 바리새인들은 그 가련한 병자를 죽게 내버려 두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은 완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화를 내신 후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Read More

검색